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방송가사람들

"오늘도, 내일도 나는 바보 아내로 살아가련다!"


방송인으로의 삶 중에 가장 가 까이 따라오는 단어는 시간이다. 특히 라디오 생방송 진행자에게 시간은 목숨과도 같다 할까? 대전MBC 표준 FM <즐거운 오 후 2시>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. 아침 일찍부터 창사기념 특집방 송을 위해 논산 장터로 취재를 가야 했다. 생방송 시간까지 돌 아오려 열심히 시간 계산을 하고 있으니 남편이 휴가라며 함께해 주겠다는 호의를 베푼다. 사실 은 좀 귀찮기도 했지만, 로드매니저를 자처하는 성의가 고맙고 모처럼 시골장터의 국밥을 혼자가 아닌 남편과 먹을 수 있겠다 싶어 좋았다. 

다행히 운전 잘 하는 로드매니저 덕에 생각보다 장터에는 일찍 도착했다.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런 과일을 가지고온 할아버지, 닭을 다섯 마리 가지고 나와 생일 맞은 아내의 옷을 한 벌 사가 겠다는 아저씨, 호떡 굽기를 준비하는 아주머니, …. “나는 행 복합니다~’ 윤항기의 노래를 외치는 장터 사람들의 삶을 하나 하나 담다 보니, 아뿔싸! 시간이 너무 지났다. 대전까지 한 시간 은 걸리는데 벌써 12시 30분. 따끈한 국밥에 대한 미련을 깨끗 하게 버려야 했다.

 빨리 달리면 방송국 근처에서 라면 한 그릇은 먹을 수 있을 것 이란 계산이 나왔다. 열심히 주차장으로 달려가니 남편은 안절 부절못하고 있다. 방송인의 남편으로 살다 보니 그 역시 미분 적분보다 풀기 힘든 방송시간 계산문제를 풀고 있었던 것이다.

 “여보! 출발해요.” 

내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까지 담겨 있는데도 로드매니저는 아무런 대꾸 없이 출발한다. 낮은 안개까지 남아 있는 장터를 정 신없이 뛰어다녔더니 고단함에 잠시 잠이 들었나보다. 그런데 ‘삐옹~ 삐옹~’ 응급차 소리에 눈을 떠보니 이런 큰일이다. 논산 시내를 빠져나와 양촌쯤 왔는데 주변에 사고가 있었는지 차들 은 꽉 막혀 있고, 응급차와 경찰차만 움직인다. 시간은 이미 1 시 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. 2시 20분이면 생방송 시작인데, 그 전에 원고도 봐야 하는데. 정상적으로 가도 30분 이상은 걸리 는데, 이를 어쩌나. 

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. 끙끙거리 는 나를 보는 남편은 말이 없다.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. 차선 하나가 열리면서 느리지만 차가 움직였다. 하지만 시간은 이미 1시 40분! 달려야 했다. 

1시 40분이 지나자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. “선배님, 왜 안 오세 요.” 그리고 1시 50분, 같이 진행하는 남자 MC에게 전화가 온 다. “어디에요? 그렇게 느슨해져도 되는 거예요?” 아, 남의 속도 모르고. 시간은 2시가 넘었다. 결국 담당 PD에게 전화가 왔다. “박은주 씨, 방송일 그만하고 싶어?” 끝장이다. “PD님, 그래도 방송 전까지는 갈 수 있어요.”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? 이제 남은 건 초치기다. 로드매니저 덕에 방송국 정문에 도착 하니 2시 15분이다. 5분 남았다. 달리자. 3층 라디오 주조정실 까지 정신없이 달려 들어오니 방송 1분 전이다. 잠시 후 큐 사인 이 들어온다. 싸늘한 스태프들의 눈빛을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받아내며 방송을 진행해야 했다. 3시 뉴스가 나가는 7분의 짧 은 휴식시간 남편이 검은 봉지 하나를 내밀고 바로 가버린다. 천 원짜리 김밥 한 줄과 단무지. 장터의 국밥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에 아침도 대충 우유 한 잔으로 때운 아내가 점심도 못 먹 고 진행하는 것이 안쓰러웠나 보다. 몰래 김밥을 입에 밀어 넣 고 허기진 배를 채운 채 4시까지 방송을 마쳤다.


문제는 지금부터다. PD의 불호령이 떨어지겠지 하는 걱정을 안고 회의실로 향했다. 그런데 이게 왠일! 스태프들이 김밥을 한 줄씩 펴놓고 먹고 있다. 

“박은주 씨, 시집 잘 갔어. 아내 혼날까봐 이런 김밥 뇌물을 내 밀 줄 아는 남편이랑 사니 행복하겠네?” 

사연은 이랬다. 방송이 시작되자 남편은 PD에게 직접 전화를 해 열심히 해명하고 아내의 허기진 배를 위해 김밥집으로 향했 던 것. 그리곤 스태프들의 몫까지 챙겨왔다.

 “남편이 저렇게 해명을 열심히 하는데 내가 뭐라 하겠어. 오늘 고생 많았네. 수고했어. 또다시 이렇게 피 말리는 일은 없겠지?” 
뒤끝 없기로 소문난 PD가 껄껄 웃는다. 

“이왕이면 좀 폼나는 도시락으로 하지.” 

괜한 핀잔을 내놓았지만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. 그날 남편의 진정함이 담긴 까만 비닐봉지 속 은박지로 싼 김밥은 정말 꿀 맛이었다. 

나는 남편 바보다. 이런 남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. 오늘도 나는 음악회 사회를 보러간다. 역시 운전은 로드매 니저, 남편 몫이다. 나는 옆자리에서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다. ‘남편은 아내 덕 보려 하지 말고 남편은 아내 덕 보려 하지 마 라. 덕을 주려 노력하라’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과 ‘108배, 3,000 배를 올려도 마지막 하나는 남겨 두라. 집에 있는 남편에게, 아 내에게 올려라.’라는 마가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살아간다. 오늘도, 내일도 나는 바보 아내로 살아가련다.

박은주 / MC